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오 12세 (문단 편집) === 기타 행적 === 한편으로 비오 12세는 1943년 그동안 천주교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져 왔던 [[성서비평학]]을 일정 기준 아래 수용, 도입하는 것을 승인했다. 아울러 추기경단에서 비이탈리아계 추기경의 수를 늘려 천주교회가 세계 보편교회에 걸맞은 면모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라디오, TV 방송을 통해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는 미력하게나마 그의 후임인 [[요한 23세]]를 비롯한 후대 교황들이 보다 개방적인 현대화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일각에서는 이런 점들을 근거로 비오 12세를 '바티칸의 마지막 전통주의, 보수/권위주의자 교황'이 아닌 '전통주의에서 현대화 시대로의 전환기에서 가교 역할을 해낸 교황'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1946년에 있었던 이탈리아 군주정 유지 투표 당시 [[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 왕조]]와 [[움베르토 2세]]를 지지했다. 비오 12세는 군주정을 유지하는 것이 이탈리아에서 가톨릭 교회가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였고, 투표 전날에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움베르토 2세를 지지하는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덕분에 적어도 [[로마]]에서는 군주정 유지 득표가 높았지만, 교황의 지지도 이탈리아 북부의 사보이아 왕조에 대한 분노를 사그라들게 만들지는 못했고 결국 군주정이 폐지되어 [[이탈리아 왕국]]은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